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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 빙의글 조디악의 킬러들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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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8-12 02:41:03
재현 빙의글 조디악의 킬러들 01

KOZ : 조디악의 킬러들 01
w. 고요의 바다


태일과 함께 퇴근해서 온 A팀의 숙소는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널찍하고 고즈넉한 주택가는 한산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A팀의 숙소는 그 안에서도 한편에 조용히 자리하고 있었다. 주의 깊게 보지 않는다면 그냥 지나칠 정도로 눈에 잘 띄지 않는 평범한 외관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태일의 뒤를 따라 대문을 들어갔다. 작게 구색만 갖춰진 정원은 꽤 깔끔했다. 의아한 눈으로 두리번대자 태일이 쾌활하게 말했다.
"달에 한 번씩 관리해주는 분이 오셔서 정리해주세요."
아아. 작게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태일이 치아를 활짝 드러내며 웃었다. 태일의 쾌활한 인상에 단단히 한 을 하는 가지런한 치아가 희게 빛났다. 여주 씨는 말이 별로 없나 봐요. 아니면, 낯 가리느라 그런가? 살가운 말에 나는 작게 웃었다. 차마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는 말은 하지 못하고 낯을 가려서 그렇다고 대답하니 태일이 내 어깨를 두어 번 쳤다. 금방 친해질 거예요! 태일의 말에 나는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글쎄요.
"형 왜 이제 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뛰쳐나온 건 마크였다. 습관적으로 한 행동이었는지 마크는 태일의 옆에 선 나를 보고 민망한 듯 웃었다. 아 맞다, 여주 씨도 있었져. 존댓말과 반말이 묘하게 섞인 말투로 멋쩍게 제 뒷목을 만지작대는 마크를 보니 새삼 이곳이 내가 그간 지내던 곳과는 전혀 다른 곳임을 실감했다. 또, 이제는 새로운 날들이 계속해서 이어지리라는 것도.
"여주 씨 방은 이 층 끝 방이에요. 가방 들어줄까?"
"아, 괜찮아요."
태일이 내 캐리어와 가방을 가리켰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깨를 으쓱한 태일은 계단 쪽으로 손짓했다. 나는 태일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이 층은 꽤 단조로운 공간이었다. 길쭉한 복도를 가운데에 두고 양쪽에 방이 있는 형태였다. 복도 한쪽이 트여서 일 층이 내려다보이는 구조였는데, 그 난간 위에는 빨래가 마구잡이로 널려 있었다. 수건이나 티셔츠 따위의 것들이었지만, 나는 알아서 시선을 돌렸다. 재빨리 빨래들을 마구잡이로 걷어낸 태일이 복도 끝 방을 가리켰다. 저기가 여주 씨 방이에요. 나는 캐리어를 끌고 그 방 앞으로 다가섰다. 푹 쉬어요! 뒤에서 들리는 태일의 목소리에 휙 고개를 돌렸다. 계단을 내려가려던 태일이 무슨 일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잠시 망설인 나는 몇 번 입을 달싹이고서야 말을 꺼냈다.
"그, 말 편하게 하세요."
내 말에 태일이 또 뺨을 씰룩이며 웃었다. 그래, 그럼! 너도 편하게 해. 웃어 보인 태일은 다시 일 층으로 내려갔다. 이 층 복도에 혼자 남게 된 나는 다시 내 방문 쪽으로 돌아섰다. 조용한 이 층 복도에 살짝 소란한 일 층의 소리가 타고 올라왔다. 나는 내 방 앞에 선 채로 문고리를 쓸었다. 내 방. 내 방이라니.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차가운 문고리는 부드럽게 돌아갔다. 태민이 은퇴 전까지 썼다던 방은 깔끔하고 큰 창문이 있는 방이었다. 불을 켰던 나는 커다란 창문으로 바깥에서도 방 내부가 다 보일까 싶어 다시 불을 껐다.
눈이 어둠에 적응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찬찬히 방을 둘러보니 방은 호화롭다거나 넓지는 않았지만, 내가 지내던 조디악의 훈련생 숙소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좋았다. 한쪽에 커다랗게 난 창문이 당장은 신경 쓰이긴 해도 마음에 들었다. 이 층 끝 방이라 그런지 천장이 높았다. 복도의 천장은 이 정도로 높지 않았던 것 같았는데. 방은 전체적으로 흰색 조로 깨끗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방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킹사이즈 침대에는 짙은 자줏빛의 촌스러운 극세사 이불이 예쁘게도 씌워져 있었다. 분명 추위를 엄청나게 타는 태민의 취향이리라.
나는 차곡차곡 내 짐을 정리하며 새로 사야 할 건 없는지 점검했다. 우선 블라인드를 달아야겠다. 워낙에 주위 일에 무심한 태민은 큰 창문이 아무렇지 않았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부담스러운 창문을 좀 가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적당히 얇은 이불도 새로 좀 사고... 처음부터 짐이 많지 않아 짐 정리는 금방 끝났다. 가벼워진 캐리어를 달랑 들어 옷장 위로 올렸다. 내 방에는 화장실도 딸려 있었다. 새삼 벅차게 설레었다.
씻고 침대에 누우니 보송한 살갗에 두꺼운 극세사 이불이 감겼다. 아, 더워. 내일 당장 마트에 가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통장 잔액을 기억해내려 했다. 훈련생 시절에는 돈 쓸 일이 없어 개인적인 일로 카드를 쓴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온종일 긴장하고 있던 탓인지 눈이 가물가물 감겼다. 사실 나는 팀 배정이 꽤 늦은 편이었다. 그런데 그 첫 팀으로 팁 십이지에, 조디악에서도 상위 클래스인 팀 십이지에 들어오게 되다니. 새삼 부담감이 밀려왔다. 태민 선배가 본인의 후임으로 직접 나를 지목하여 추천한 건 쑥스러우면서도 분명 기쁜 일이지만, 훈련생들 사이에서 뒷말이 나온 것도, 나 스스로 부담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침부터 한참을 걸려 본부에서 인사이동 절차를 밟은 일, 새 아이디 카드 등록을 한 일, 오후가 훌쩍 지나서야 훈련생 숙소에서 짐을 싸서 나와 A팀 사무실에 찾아간 일, 태일의 앞에서 무작정 기다린 일, 냉소적인 인준과 은근히 시끄러운 마크, 태용, …그리고 정재현. 첫인상은 좀 무서웠지만, 예의 바른 사람. 나는 뻑뻑한 눈을 느리게 깜빡이다가, 잠으로 빠져들었다.
원래도 잠을 깊게 자는 편은 아닌 데다가 잠자리까지 바뀌니 계속 선잠을 잤다. 나는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 속에서 몽롱함에 휩쓸리며 내가 잠을 자는 중인지 깨어있는 중인지를 계속해서 고민했다. 나는 지금 잠이 든 상태일까? 아니면 아직 잠들지 못하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중인 걸까? 분명 꿈속에 있는 감각인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침대 위에 뉘인 몸의 감각 또한 생생하게 느껴졌다. 꿈은 꿈인데... 나는 최근의 일들을 되짚어 보았다. A팀 사무실, 메가밍크스를 들고 있던 태일, 태일의 손에서 메가밍크스를 빼앗는 인준, 느리게 창가에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정재현, 정재현과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쳤다고? 그때 정재현은 창밖에서 눈을 떼지 않았는데? 갑자기 내가 있는 곳의 배경이 바뀌었다. 나는 언젠가 새벽에 지원을 나갔던 곳의 포인트에 서 있었다. 드라구노프?* 누군가가 내 손을 가리키며 말했다. 당황해서 내 손을 쳐다보니 내 손에는 드라구노프가 들려 있었다. 이게 언제부터 들려 있었지? 당황한 나머지 주춤 물러서자 그 사람은 손짓했다. 네 자리로 가. 나는 그러려고 했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그래서 두 눈을 번쩍 떴다.
(*드라구노프 : 소현에서 만든 저격소총)
억지로 눈을 뜨자 내 눈꺼풀이 파르륵 떨렸다. 꿈이네. 나는 온몸에 엉킨 두툼한 이불을 치우며 몸을 일으켰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빠르게 내 가슴을 때려댔다. 가슴께를 한 손으로 꾹 누르며 다른 한 손으로는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커다란 창으로 어슴푸레한 빛이 비쳐들었다. 나는 아예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바깥은 새벽 특유의 푸르스름한 빛이 가득했다. 벽에 기대어 창밖을 내려다보는데, 후드티를 뒤집어쓴 인영이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게 보였다. 정재현이었다. 방금 꿈에서 본 탓일까, 나는 홀린 듯 방을 나가 1층으로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가자마자 마침 현관으로 들어오던 정재현과 딱 마주쳤다. 안 자고 있었어요? 정재현의 물음에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혀 대답할 말을 생각하느라 머리를 굴렸다.
"아, 저, 물 좀 마시려고..."
내 말에 정재현은 내 눈을 깊이 쳐다보았다. 당신이 꿈에 나와서, 그냥 당신이 보이기에 내려왔어요. 그 말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지만, 꾹 눌렀다. 처음 본 날부터 저런 말을 하면 미친 사람인 줄 알 테니까. 정재현은 잠시 조용히 서 있더니 먼저 발을 뗐다. 그 뒤를 따라가니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낸 정재현이 컵도 두 개를 꺼내 물을 따랐다. 마셔요. 나직한 정재현의 목소리가 울림이 되어 내 귀를 타고 흘러내렸다. 정재현이 내민 물컵을 향해 뻗는 내 손이 작게 떨렸다. 나는 잠자코 그 물을 받아 마셨다. 어쩌다가 내가 이 새벽에 정재현과 마주 보고 물을 마시게 됐지? 나는 이 상황이 어색해서 컵에 입을 댄 채로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다가 정재현을 쳐다보자 그와 눈이 마주쳤다. 우리 둘은 물을 마시느라 고개를 젖히면서도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정재현이 먼저 컵을 내려놓았다. 김여주 씨. 내 이름을 부르기에 급히 입에서 컵을 떼려다가 사레가 들렸다. 캑캑거리는 소리를 내며 창피함에 숙인 내 머리통 위로, 정재현의 목소리가 고요하게 내려앉았다.
"김여주 씨는 새벽이랑 잘 어울리네요."
퍼뜩 고개를 들었지만, 정재현은 부엌을 나가버렸다. 새벽이랑 잘 어울린다고? 그게 대체 무슨 말이람. 나는 사용한 컵을 싱크대에 넣어놓고는 재빨리 정재현의 뒤를 따라 나갔다. 정재현은 1층 방을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계단 옆쪽의 방으로 들어간 정재현이 문을 닫기 전, 나를 쳐다보았다. 짧은 찰나에 눈이 마주쳤고, 문이 닫혔다.
* * *
"아 씨..."
어제는 해가 진 후에 들어와서 몰랐는데, 내 방 창문은 정확히 떠오르는 아침 해를 향하고 있었다. 새벽 내내 정재현이 한 말에 대해 생각해 보다가 겨우 잠들었는데 잠을 깨운 것이 눈 아픈 아침 햇살이라서 화가 났다. 나는 어제 한 생각을 정정하기로 했다. 이태민의 무심함은 보통 정도가 아니다. 정도를 넘었다. 이렇게 큰 창문에 블라인드 하나 안 달고 어떻게 산 거야. 나는 궁시렁대며 일어나 샤워부스로 들어갔다.
"여주 굿모닝"
출근 준비를 마치고 내려가니 식탁에 앉아 있던 마크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꾸벅 인사를 하자 나를 등지고 앉아 있던 인준이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무언가를 열심히 씹고 있는 황인준의 코에 안경이 대롱대롱 간신히 매달려 있었다. 당장 바닥으로 떨어진다 해도 이상할 게 없는 모양새였다.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안경을 올려주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인사하자 황인준도 나에게 인사했다. 마크와 인준은 각자 다른 시리얼을 먹고 있었다. 둘의 그릇 옆에는 각각 오레오 오즈 상자와 콘플레이크 상자가 놓여 있었다. 자세히 보니 시리얼 상자에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오레오 오즈 캐릭터 위로는 한껏 휘갈겨 적은 MARK, 콘플레이크 상표 위로 단정하지만 삐뚤빼뚤하게 황, 인, 준. 어쩐지 유치원생들이 각자 집에서 가져온 간식을 먹고 있는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이게 웃겨 보이나 본데, 우리도 좋아서 이름 써둔 거 아니에요."
"맞아요. 이름 안 적으면 태용이 다 먹을지도 몰라."
그래서 그렇게 귀엽게 이름까지 적어 두셨다? 그치만 나는 예의 바르게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변명하듯 말하는 인준과 마크에게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황인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삐죽였다. 나는 문득 정재현도 시리얼 상자에 이름을 적을까, 궁금해졌다. 물 한 잔을 따라 마시고 있으니 마크가 제 오레오 오즈를 가리켰다. 먹을래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나는 마크와 인준을 두고 먼저 집을 나섰다.
조디악의 건물은 겉으로 보면 절대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 알 수 없다. 아마 이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이 건물을 그냥 수많은 회사 건물 중 하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는 화려한 기업 건물들 사이에 함께 묻혀서 서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이 건물은 조디악의 남서울 본부이고, 이 곳의 5층이 십이지 A팀의 사무실이다. 1층 게이트에서 사원증을 찍자 비어있던 소속 칸에 '팀 십이지 (A)'라는 글자가 떴다. 어제 사원 정보를 업데이트한 결과였다. 팀 십이지 소속 김여주, 팀 십이지 소속, 소속... 기분이 좋아진 채로 엘리베이터에 탔다.
5층에 내린 나는 어제의 그 안내데스크를 지나 안쪽 사무실로 곧장 향했다. 밤을 새운 듯 퀭한 얼굴의 태일이 눈을 비비며 나에게 인사하더니 다시 제 책상 위로 엎어졌다. 태일의 컴퓨터 화면에는 화면 보호기가 열심히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사무실 문 위쪽에 달린 디지털 시계를 확인했다. 시계에는 날짜, 시간 외에도 그 날의 작전이 몇 건인지, 작전에 참여하는 요원이 누구인지 표시된다. 표시된 작전은 0건.
조디악의 요원들은 킬러지만 매일 작전을 나가는 건 아니다. 오늘처럼 사무 업무도 해야 한다. 그 일은 '설계'라고 한다. 설계란, 접수된 의뢰를 파악한 후, 의뢰 달성을 위한 세밀한 작전을 세우는 것이다. 의뢰에 따라 설계에 필요한 정교함이 다르므로 지능 랭크에 따라 의뢰 접근 권한이 차등하게 주어진다. 내 지능 랭크는 A-이기 때문에 그 등급에 맞는 의뢰들만 열람하고 설계할 수 있다. 물론 내가 설계한 작전들이 그대로 쓰이는 것은 아니다. 내가 설계를 마친 작전들은 다시 조직의 '설계부'에서 접수하게 되고, 그곳에서 검토의 검토를 거친다. 설계는 아주 머리 아픈 일이다. 다행인 건 월마다 본인의 할당량만 채우면 된다는 것이다.
설계 외에 사무실에서 해야 하는 일로는 '학습 포인트'를 채우는 것이 있다. 이게 웬 수험생 같은 소리냐고? 우리는 조직에서 훈련 시, 여러 과목에 대해 훈련받는다. 그리고 그 과목에 대해 등급이 매겨져서 기록되고, 그 기록과 랭킹 테스트 성적을 합쳐 랭크가 매겨지는 식이다. 그 과목들에 대해 말해보자면 체력, 순발력, 집중력, 처세술, 관찰력, 주의력 등등 아주 다양하다. 그중에서 실전 훈련으로 채워야 하는 부분을 제외하고, 지식 기반의 과목은 인터넷 강의를 듣거나 실습을 해서 학습 포인트를 채워야 한다. 학습 포인트 또한 월마다 할당량이 정해진다.
하나 예를 들어 보자면 요원들은 작전에 따라 위장취업을 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에, 기본적인 문서 프로그램 교육을 받는다. 나는 컴퓨터를 잘 다루지 못해 문서 처리 능력은 항상 2등급과 3등급을 왔다 갔다 했다. 또 문서 프로그램은 계속 사용하지 않으면 그 내용을 금방 까먹어버릴 수 있으므로,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으로 실습하거나 인강을 들어 꾸준히 복습해야 한다. 이렇게 본인이 낮은 등급을 받은 부분에 대해 반복적인 학습을 통해 학습 포인트를 채워야 하는 것이다.
어제 태일에게 안내받은 내 자리는 구석 창가 자리였다. 정재현과 등을 맞대고 앉는 위치의 자리. 정재현은 제 컴퓨터 모니터를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다. 정재현을 지나 내 자리로 가니 정재현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일부러 눈을 내리깔았다. 그도 알 것이다. 내가 그의 시선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있다는 걸. 우리는 같은 것을 배웠으니까.
나는 컴퓨터를 켰다. 내 자리는 안쪽에 있지만, 벽을 향하고 있어서 다른 요원들이 무엇을 하는지 보려면 뒤를 돌아야 했다. 그게 조금 신경 쓰였지만, 각 자리마다 파티션이 쳐져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컴퓨터가 켜지는 동안 나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뒤를 돌아보면 정재현이 나를 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 근데 돌아봤는데 진짜 나 보고 있으면 어떡해? 안 보고 있으면 그건 또 그거대로 웃기고. 나는 꾹 참고 고개를 정면으로 해 모니터만 바라보았다. 부팅되는 화면이 잠시 까맣게 되며 뒤쪽이 비쳤다. 그리고 맨질맨질한 화면에 비친 정재현은 아예 내 쪽으로 돌아앉아 있었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삐걱대며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정재현이 눈인사를 건넸다.
"아,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자 정재현은 대답 대신 나에게 미니 사이즈의 초코바를 내밀었다. 뜬금없는 친절에 의아해서 눈을 동그랗게 뜨자 정재현이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나는 냉큼 초코바를 받았다.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면서 별다른 말도 없이 그냥 빤히 바라만 보고 있기에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니 정재현은 흐음, 하며 고개를 다시 반대편으로 기울였다. 괜히 긴장돼 손을 올려둔 무릎께의 바짓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열릴 것 같지 않던 정재현의 입이 드디어 열렸다.
"김여주 씨, 주토피아 봤어요?"
한껏 긴장한 게 무색할 정도로 당황스러운 질문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작아 잘못 들었나 싶기도 했다. 주토피아요? 어이가 없어서 작게 되물으니 정재현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주토피아요. 정재현의 표정이 한없이 진지했다. 그래,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니란 말이지. 주토피아. 그래, 주토피아 말이지. 당황한 나머지 손바닥에 땀이 새어 나왔다. 이 사무실에 와서 당황을 몇 번이나 하는 거야. 나는 가볍게 눈가를 찡그리며 눈을 깜빡였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주토피아요?"
얼떨떨한 목소리로 다시 물으니 정재현이 또 고개를 주억거렸다. 진짜로 나한테 디즈니 애니메이션 봤느냐고 물은 거야??? 질문의 의중을 알 수 없어 나는 그냥 단순하게 대답했다. 아뇨, 안 봤어요. 단호하게 대답하자 정재현의 표정이 묘해졌다. 웃는 건지, 그냥 볼을 씰룩이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어째 처음 봤을 때랑 똑같은 무표정인데도 느낌이 달랐다. 김여주 씨. 여전히 무슨 비밀이라도 털어놓듯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하기에 똑같이 속삭여 대답하자 정재현의 입꼬리가 올라갈 듯, 말 듯 씰룩였다.
"김여주 씨, 거기 나오는 토끼 닮았네요."
"네??"
황당함에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금껏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게 하겠답시고 노력한 게 무색하게 나는 꽤 큰 소리로 대답해버렸다. 더불어 표정도 한껏 어이없다는 듯 찡그리고서. 순간 터진 목소리에 당황해서 주위를 살피니 통로 너머 자리에 있던 마크가 미어캣 마냥 쫑긋 고개를 세우고는 무슨 일이냐고 온 얼굴로 묻고 있었다. 나는 그냥 고개를 젓고는 다시 내 컴퓨터를 향해 앉았다. 모니터에 옅게 비치는 뒷자리에는 정재현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제 일을 하고 있었다.
참 나. 지금 나한테 그.. 뭐야, 주토피아 토끼 닮았다고 한 거 맞지? 꿈 아니지, 지금? 나는 홀린 듯 구글을 켜 '주토피아 토끼'를 입력했다.

재현 빙의글 조디악의 킬러들 01

까꿍. 주토피아를 보지 않은 나에게도 꽤 낯익은 토끼가 나를 놀리듯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얘랑 닮았다고? 고개를 몇 번 갸웃거리던 나는 문득 누가 볼 새라 구글 창을 껐다. 정재현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있었다. 이상한 사람. 나는 그렇게 정재현을 정의내렸다. 정재현이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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