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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 내일을 잊은 그들에게

  • 엑세니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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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17 21:26:40
<버닝> 내일을 잊은 그들에게
<버닝>
★★★★

2010년 <시> 이후 8년만에 돌아온 이창동 감독의 <버닝>입니다. 홍상수 감독이 좀 쉬려 한다는 말과 이창동 감독이 차기작 곧 나온다는 말은 믿지 말라는 영화계 농담이 있을 정도로 오래 기다렸네요. 감독의 무게감에 더해 유아인과 스티븐 연의 만남이라는 데에도, 연기 경험이 없는 신인을 발탁해 주인공으로 썼다는 데에도 기대를 얹을 수 있었습니다. 공개된 포스터와 예고편에도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줄거리 또한 마찬가지였죠.

<버닝> 내일을 잊은 그들에게

유통회사 알바생 종수는 배달을 갔다가 어릴 적 같은 동네에서 살았던 해미를 만나고, 그녀가 아프리카 여행을 간 동안 키우는 고양이를 돌봐 달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온 해미는 아프리카에서 만난 벤이라는 수수께끼의 남자를 종수에게 소개하죠. 뚜렷하지 않은 직업에도 넘치는 형편, 도통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소 등 예감은 영 좋지 않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벤은 마침내 종수에게 자신의 비밀스러운 취미를 고백합니다.

왠지 모르게 음침하고, 왠지 모르게 으스스합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장면 혹은 설정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잡힐 것 같은데 잡히지 않습니다. 알 것 같은데 알 수가 없습니다. 의외로 <버닝>은 예상만큼 알쏭달쏭한 영화는 아닙니다. 기승전결은 분명하고, 열린 결말이나 해석의 여지도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물증'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심증만으로 노를 저어 나아가야 합니다.

해미는 손으로 귤을 먹는 시늉을 합니다. 이 때 중요한 건 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귤이 없음을 잊는 것이라고 합니다. 초장부터 두통은 예고되었습니다. 인간의 인식을 건드리겠다고 선언한 순간 현실과 비현실의 합일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버닝>은 그 숙제를 관객들이 아닌 종수에게 돌립니다. 관객들은 그런 종수를 바라보며 영화가 털어놓는 이야기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불친절 속의 친절입니다.

<버닝> 내일을 잊은 그들에게

종수는 '가지지 못한 자'입니다. 분노조절장애 아버지는 소송에 휘말렸고, 어릴 적 집을 나간 어머니는 소식이 없습니다. 야근과 특근, 군기가 당연시되는 물류 알바를 전전하며 대남 방송으로 조용할 날 없는 파주에 살고 있습니다. 예능에서 누가 웃고 떠들건, 미국 대통령이 연설을 하건 말건 눈과 귀에 들어오는 소식은 청년 실업이 하늘을 찌른다는 이야기뿐입니다. 살아서 사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절로 흘러 살게 되는 것만 같습니다.

그런 그의 앞에 해미가 나타납니다. 힘들다고 말하며 술잔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하늘에서 뚝 떨어졌습니다. 역시나 어두운 앞날에 해미는 차라리 그냥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 노을과 함께 '자연스레' 떨어지는 해처럼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해미는 종수에게 한 줄기 빛이 되었습니다. 사랑은 아닙니다. 무언가 다른 것이, 좋아할 만한 것이 생겼다는 느낌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벤이 나타납니다. '가진 자'가 나타났습니다. 자신과 나이 차이도 별로 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직업도 없는 것 같은데 집도 좋고 차도 좋습니다. 해미마저 빼앗긴 기분입니다. 그러면서도 만족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다 당연하고, 심지어 금방 지루해합니다. 결정적으로 가지지 못한 자들이 바라는 '자연스러움'을 한낱 '취미'로 규정합니다. 자신의 행동을 하늘에서 '자연스레' 내리는 비에 비유합니다.

<버닝> 내일을 잊은 그들에게

영문 모를 상실과 좌절, 무력함에 젖은 눈에 들어오는 광경은 자신과 별다를 것 없어 보임에도 잘 사는 사람들입니다. 나서서 주인공이 되고 싶지는 않지만, 누군가 자신을 그렇게 여겨 주면 좋겠습니다. 때문에 종수는 자신이 주인공으로, 영웅으로 기억되는 우물에 집착합니다. 손 안의 귤을 떠올리면 언제 어디서든 맛있는 귤을 먹을 수 있듯, 기억 속 우물은 언제 어디서든 그를 영웅으로 만들어 줄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마침 그런 그의 앞엔 물리칠 이유를 자기 손으로 들고 나타난 악당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선뜻 하지 못합니다. 하고 있다고 말은 하지만 해 놓은 것은 없습니다. <버닝>은 거대하고 막연하기만 한 세상을 마주 본 청춘들의 어찌할 줄 모를 혼란을 담아냈습니다. 종수에게 벤은 뼈를 울리는 베이스를 느끼라고 이야기합니다. 벤에게 요리처럼 일상적이고 평범한 행위는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고귀한 의식으로 변모합니다. 대단한 재주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렇게 생각하면 그만입니다. 있음을 바라는 대신 없음을 잊어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종수가 글을 쓸 수 있는, 지금의 청춘들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원동력일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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